EBM의 사각지대
대한민국에서 의대에 입학한 학생들은 2년간의 예과생활을 거친 후, 4년 동안의 본과생활을 거친다. 본과 1,2학년 때는 해부학, 생리학, 병리학, 면역학 등의 기초의학과 기초임상의학을 배우고, 3,4학년 때는 병원에서 실습을 돌며 임상에 대한 경험을 쌓는다.
기본적으로 의대생은 짧은 시간 내에 방대한 양의 지식을 이해하고 암기해야하기에, 교과서나 교수님의 말씀을 통해 얻는 지식에 의문을 품고 비판적인 공부를 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의학적 지식들이 절대적이며 진리인 것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된다. 시험공부하며 학습한 내용이 많은 의대생이 의학에 대해 갖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비판적이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더라도 방대한 의학 지식 앞에서 진리탐구의 욕구 보다는 눈앞의 지식을 배우고 시험을 잘보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될 수밖에 없다.
3,4학년 병원 실습을 돌며 의대생들은 환자에 대한 평가는 불연속적이고 단선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한다고 배운다고 한다. 우선 환자의 병력을 청취하고 신체 검진을 하고 검사를 요청하고 결과를 분석한다. 상당부분 인턴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겠지만, 종종 실습을 직접 하기도 한다. 이후 이 모든 데이터를 종합한 뒤 문제에 대해 몇 가지 가설을 세운다. 그런 뒤 기존의 데이터베이스에 기초한 통계적 가능성을 각 증상과 신체적 이상 및 검사 결과에 대입하면서 그 가설들을 선별한다. 그러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진단이 나올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베이스 분석법으로, 알고리즘을 만들고 근거중심의학(Evidence based Medicine, EBM)을 엄격히 고수하는 의사들이 선호하는 의사결정 방식이다.
나의 예과시절에도 EBM을 강조한 교수님들이 몇 분 계신다. 의학이 과학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고자 노력하셨다. 근거중심의학(EBM)이란 통계적으로 증명된 데이터에만 판단과 결정의 근거를 두려는 의학이다. 물론 효율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하는데는 큰 도움이 된다. 증상과 X-ray, MRI 등의 검사결과, 병변 등이 특정한 질병에 명백히 해당한다면 EBM만큼 효율적인 판단방법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의존하면 오로지 숫자에만 매달려 소극적으로 치료법을 결정하는 위험이 발생한다. 평균치에서 벗어난 환자를, 평균치에 맞추어 진단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통계는 각 개인이 아니라 평균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숫자는 임상시험을 통해 결정된 '최적의 치료법' 이 환자의 특정한 필요와 가치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요즘 실습생들과 레지던트들은 이런 탬플릿과 EBM을 신조로 배운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 제롬그루프먼은, 다음세대의 의사들이 엄격한 이진법 체계 내에서 작동하는, 잘 프로그램된 컴퓨터처럼 움직이도록 길들여지고 있다며 걱정된다고 했다.
EBM이 필연적으로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의학이 근본적으로 불확실성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먼 훗날 인공지능이 발전하더라도 절대 컴퓨터가 의사를 대신할 수 없다. 최종 판단과 진단은 여러 불확실성을 고려하고도 개개인의 환자에게 최적의 치료법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환자를 사람대 사람으로서 대해야함은 물론이다.
의사가 EBM을 토대로 진단의 프레임을 결정하고 진단한다면 당연한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이 경우 환자가 가진 질환의 본질에 근접할 수 없다. 의사가 낙관적인 마음가짐으로 환자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환자의 불안함을 덜어주어야, 믿음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의사들은 이런 불확실성을 확실성으로 바꾸고 싶어 진실에서 벗어난, 인지적 오류를 일으키기도 한다. EBM은 그런 인지적 오류를 만드는데 기여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여러 가지 사항들 중 한 두 가지가 평균치에서 어긋날 경우, 다른 대안을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지만 불확실성을 피하고자 EBM을 핑계 삼아 그런 오차들은 통계적으로 감안 가능하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다.
의술은 이미 정해진 사실 외에 다른 영역에서도 해결책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현재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추측도 실제 경험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의사들이 적절한 검사를 선택하여 시행하고 그것이 컴퓨터로 분석되어 나오면 정확한 진단이 내려지고 거기에 맞는 치료법이 정해진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로 여겨진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단순할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위 말하는 의학적 사실도 단지 생물학적 근사값일 뿐이다. 결과 데이터나 예후도 통계학적인 것이고, 그것을 개별환자에게 적용할 때는 항상 다양한 선택들 중에서 하나를 골라내야 한다. 경험이 많은 의사들은 임상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이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환자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실제 경험과 유사사례의 연구, 상식의 실천이 제대로 이루어져야한다. 물론 겸손한 자세도 필요하다. 많은 의학적 데이터들은 대단위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한 역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의사는 환자 한사람, 한 개인을 상대하고 있으며, 그 개인이 항상 통계학적 정규분포 곡선 속에 포함된다는 보장은 없다. 통계는 확률적 진실을 말할 수는 있지만, 개인의 다양한 특성은 묵살하고 희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EBM이 잘못된 방법이라는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가치로 마치 과학적 진실처럼 받아들여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EBM과 여러 과학적 지식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삼되, 열린 사고를 하며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야한다. 절대로 지식에 자만하지 않아야 한다. 항상 다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해야하며 그것마저도 절대적이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어찌 보면 의사에게도 마치 예술가처럼 열린 사고가 요구된다 할 수 있다. 본인의 불완전함과 의학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인 채 매 순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의사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그땐 진정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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