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의사되기
(1)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기
어떤 의사든 진단과 치료의 오류를 범한다. 흔히 의료사고를 X-ray, MRI 등의 자료를 잘못 판독해서, 약물 투여량을 실수로 잘못 조절해서, 바늘을 실수로 잘못 꽂아서 등등의 기술적인 오류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대부분의 의료과실은 기술적실수가 아니라 의사의 사고의 결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오진은 자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정보를 무시한, 일련의 인지적 오류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부정확한 진단사례 100건을 분석한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오직 4건만이 의학지식의 부족으로 일어난 오진이고 나머지 96건은 의사의 인지적 오류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인지적 오류를 범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환자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음식을 소화하지 못해 체중이 30kg대로 빠진 한 환자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자. 이 환자는 15년간 여러 의사들을 만났고 여러 진단을 받아 각종 치료법들을 모두 시행했지만, 병은 낫지 않았다. 기존의 의사들은 이 환자에게 과민성 대장증후근으로 인한 거식증이라는 병명을 내렸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의사는 당 성분이 많이 함유된 식단을 요구하며 하루 3000칼로리를 섭취하길 요구하기도 했다. 한번 진단이 내려진 이후, 그 다음 의사들은 이전 의사들의 진단 프레임에 갇혔고, 환자의 말에 귀 기울이고 진심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기 보단 이미 진단이 완벽히 내려진, 정해진 질병으로 특정 지어진 환자로 인식했다. 하지만 한 의사는 달랐다. 이 환자를 진찰하는 한 의사는 환자의 병력기록데이터를 책상 한 켠으로 치웠고, 흰 가운의 가슴주머니에서 펜을 꺼내들고 서랍에서 줄 처진 수첩을 꺼냈다.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복잡한 병명과 진단내용을 설명하기 전에 환자와 대화를 하고자 했다. 천하의 시간이 다 내 것이라는 듯 태평한 표정이었다. 이미 많은 진료결과와 각종 진단들에 대한 서류들을 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이 의사 주도하에 이루어진 혈액검사와 내시경 검사 결과, 거식증으로 특정 지어졌던 환자는 소아지방변증을 앓고 있었다. 이는 글루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병이다. 그간의 의사들이 완전 잘못된 진단을 내렸었던 것이다. 그런 의사들 때문에 이 환자는 15년간 고통 받았었다.
결국 임상에서 가장 요체가 되는 것은 환자의 말을 듣는 것, 즉 병력 청취이다. 이는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가능하다. 그간의 의사들이 해내지 못한걸 보면 쉽지 않은 일이다. 환자를 치유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그 속에 진단이 들어있다. 듣는 법이란 단순히 환자의 말을 사려 깊게 듣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말 이외에도 비언어적 의사소통이 존재한다.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 의자에 앉아 말을 하기 전까지의 행동, 표정, 자세 등이 모두 의사에겐 진단 시 고려 대상이다. 흔히 침묵은 중요한 의미를 전해주며 환자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을 듣는 법을 가르쳐 준다. 직관이 날카로워지면 이러한 것들을 관찰하고 사려 깊게 인지한 결과, 환자에게 잠재된 생각들을 모아 형상화해낼 수 있다. 의사가 병력청취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의학적인 문제와 함께, 증상 뒤에 숨어있는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병력을 청취하는 과정에서 의사는 환자를 한 인간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환자의 기본적인 정보와 가족, 교육, 직업 등 뿐만 아니라 환자가 가진 특성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리하여 무엇이 환자를 ‘오늘의 그’로 만들었는지 이해하게 되며, 환자에게 가해지는 과도한 정서적 스트레스와 그에 대응하는 환자의 행동을 받아들이게 된다.
책의 저자 버나드 라운은, “의사가 환자에게 한계를 정해주지 말고 환자 자신이 한계를 정하게 하라”는 것이 나의 오랜 신조였다.“고 한다. 의사는 환자를 병을 치유하기 위한 동등한 파트너로 인식하고, 같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환자의 참여를 유도해야한다. 이를 위해서 병력청취가 기본이 되야함은 당연하다. 또한, 생물학이나 의학도 쉽고 분명한 언어로 설명하면 일반인이 이해하지 못 할 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 환자를 파트너로 만들기 위해선 의학지식, 의사의 마음, 의사소통 능력 등이 고루 갖추어져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의사가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의학적 문제들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까지는 평생이 걸린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임상의 대가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2) 인지적 오류 범하지 않기
앞선 주제에서 의사가 환자의 말과 행동을 제일 우선시해야 한다고 했지만, 의사의 감정이나 환자에 대한 편견이 오진을 낳기도 한다. 의사들이 싫어하는 환자들의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자기관리를 못하는 환자들이다. 의사들은 알코올에 찌든 사람들, 골초, 과다비만인 사람들에대해 선입견을 두고 진단하는 경향이 있다. 병의 원인을 자기관리실패에 두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치료법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는 환자들이다. 의사들은 이런 환자들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그런 환자들이 본인 병의 심각성을 깨닫고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도 의사의 능력이다. 세 번째는 중증환자들이다. 의사들은 중증환자와 거리를 두려는 경향이 있는데, 최고의 치료방법에도 말을 듣지 않는 질병을 치료할 때 많은 의사들이 깊은 패배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환자에 대한 과도한 긍정적인 생각은, 진단과 치료를 미루거나 생략하도록 유도해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의사가 환자의 병력청취에 정신을 쏟고 환자의 질병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과 습관 등등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들은 오히려 의사에게 선입견과 편견을 심어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는 환자를 협력적 파트너로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발을 한발 뺀 뒤 인지적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경계해야한다. 의사로서의 권위를 세울 필요도 있다. 지성과 직관, 세밀한 관심, 경청, 심리적 통찰력, 경험이 하나로 결합될 때 최선의 진단과 치료가 이루어진다.
아무리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여러 문제들을 경계하고 성실히 진단과 치료에 임하더라도, 의학의 본질에 내재된 불확실성과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실수와 오판을 할 수 밖에 없다. 의사들이 실력을 쌓기 위해선 자신의 실수와 오판을 인식하고 기억해야한다. 의사들의 전문성은 지속적인 의료행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기술적 실수와 그릇된 판단을 피드백을 통해 깨닫고 이를 수용할 때 발전한다. 실수를 기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이를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최고의 임상의가 되고 싶다면, 스스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분석하고, 늘 가까이 두고 참고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외과의사의 말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저명한 심장수술 전문의는 이렇게 말했다. ‘완벽은 최선의 적이다. 수술에선 그 무엇도 완벽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타협이다.’ 이를 위해선 의사로서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접어야 하므로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 우리는 완벽하진 않더라도 최선을 위해 노력하고, 오류와 실수를 경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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