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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의 종말』(한병철, 2021) 서평

by 냐냐리냐 2022. 9. 13.

리추얼의 종말 : 삶의 정처 없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2021, 한병철)

언제부턴가 가식을 부리는게 싫고 인간관계에서 가면을 쓰는게 힘들어졌습니다. 제 스스로가 편하고자 순간순간의 생각과 감정에 충실하게 살아온지 몇 년째입니다. 저와 가까운 사람들,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정하게 대하려고 하지만, 일하며 만나는 사람들이나 한번 보고 마는 사람들에게는 직설적이고 가감없습니다. 어느덧 공손함이 사라졌습니다. 제 스스로에게 충실할 수록 날카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흥미롭게 읽은건 상징, 형식, 축제, 연기(가면), 끝맺음, 고요, 침묵, 죽음, 규칙, 놀이 등 평소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가치를 다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저런 가치들을 잊고 살기도 했고, 부정적으로만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진정성 강제

진정성 강제 단원이 재밌었습니다. 개인주의가 더 심해지니까 프라이버시가 더 중요하고 서로 벽을 더 많이 칠것 같은데, 어느 선에서는 오히려 본인을 더 오픈하려고 합니다. 꼭 SNS가 아니더라도요. 저는 그런성향이 좀 심한줄알았는데 저만 그런게 아니라는걸 알게됬고, 또 사회가 아이러니하게 그런 분위기를 만들었구나 싶었습니다. "사회관계에서 프라이버시와 친밀한 영역이 더 많이 드러날 수록 그 사회관계는 더 참되고 진정하다(30pg)"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는것 같습니다.

 


■ 축제와 종교

1) 휴식

(54pg) "휴식과 노동은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개의 실존 형태다. ... 휴식은 새로운 노동을 위한 기력 충전도 아니다. ... 휴식은 어떤 식으로도 노동과 접촉하지 말아야 한다. ... 오늘날처럼 휴식이 노동으로부터의 회복으로서 노동에 가까워지면 휴식은 존재론적 부가가치를 잃는다."

(59pg) "휴식도 생산에 장악되어 휴가로, 회복을 위한 중단으로 격하된다. ... 일부 사람들에게 휴가는 공허한 시간, 공허에 대한 공포다. 거세지는 성과 압박은 회복에 도움이 되는 중단마저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 능동적이며 리추얼적인 휴식은 오늘날 괴로운 무위에 밀려난다.​"

- 휴식과 관련해서 과거에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휴식은 일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사람이 고기만 먹고 살 수 없고 채소만 먹고 살 수 없듯이 일과 휴식 모두 필요하고 둘은 별개의 개념이라고요. 예를 들어 제가 휴식을 취한다는 건 '일을 하지 않기로 선택함 / 무언가를 하지 않기로 선택함'이 아니라 '휴식을 하기로 선택함'이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휴식에 대해 저런 인식을 만든건 생산 강제, 자기 착취를 하도록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인 것 같습니다. 책의 주장에 대해 완전 동의하는 내용은 많지 않았는데, 적어도 휴식에 대한 내용은 100% 공감하고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 종교
(61pg)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별은 종교에 본질적으로 귀속한다. 신성함은 공동체를 살리는 사물들과 가치들을 통합한다. 신성함의 본질적 특징은 공동체화다."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반대가 종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종교의 형식, 상징, 제식, 절차 등 리추얼적인 부분에 대해 높은 가치를 두고 종교를 권장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느정도는 이해를 하겠으나 종교가 없고 그런 절차를 좋아하지 않는 저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종교행사가 리추얼이 아니라 루틴이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생사를 건 놀이

​이 단원은 좀 아쉬웠습니다. 약한 놀이(생산의 논리 / 노동으로부터의 회복)를 하지 않고, 주권을 갖고 하는 '강한 놀이'는 죽음과 상호교류를 하는게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예시로 든건 자유 죽음(자살) 뿐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자유 죽음이 예시가 될 수 있나 싶습니다. 

앞선 단원에서도 삶이 놀이의 성격을 되찾으려면 삶 자신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거창하게 이야기 했음에도 이를 가능케 하는건 적극적인 태도의 자살이라는게 아쉽습니다. 꼭 실질적 의미의 죽음 만이 강한 놀이를 가능케 하는건 아닐텐데 말입니다. 
물론 저자의 의도는 생사를 걸 정도로, 모든걸 탕진할 정도의 자세로 하는 놀이에 의미가 있다는 말인것 같긴 합니다. 그래도 현대 시점에 맞춘 구체적인 예시를 더 들지 못한게 아쉽습니다. 처음으로 저자가 궤변가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살아있어야만 놀이가 의미를 갖는건데 죽음이 놀이라고 하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요약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공손한 태도를 갖는게 어려웠습니다. 제 의지, 의도, 생각과 상관 없이 형식적인 예의를 갖추는게 싫었기 때문입니다. 책 『리추얼의 종말』에서는 현대인들이 너무 과한 나르시시즘적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신자유주의 사회가 생산 강제, 진정성 강제의 기조를 통해 자기 착취를 유발하고 자발적 노예를 유도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책은 흔히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절차, 형식, 제도, 규칙, 가식 같은 외적인 가치들에 주목합니다. ‘리추얼’로 축약되는 저런 개념들은 시간 속에서 쉬어갈 수 있는 집이 돼주며, ‘공동체 없는 소통’이 만연한 요즘 ‘소통 없는 공동체’를 가능케 합니다. 리추얼을 추구함으로서 외적 형식을 통해 탈내면화, 탈심리화 한다면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로부터 본인의 내면을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34pg) “외적 형식이 내적 변화를 가져온다. 예컨대 예법에 맞는 공손한 몸짓은 정신적 효과를 낸다. 아름다운 외관은 아름다운 영혼을 산출한다.”

 


※ 발제


[1] (18pg) "반복은 리추얼의 본질적 특징이다. 그러나 집약성을 산출할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리추얼은 '루틴'과 다르다."​

리추얼과 루틴은 다른 개념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집약성을 산출할 능력이 있다는게 어떤 뜻일까요?

 

[2] (63pg) "삶이 외적인 목적에 종속되지 않고 삶 자신과 관련 맺을 때, 삶은 놀이의 성격을 되찾는다. 되찾아야 할 것은 관조적 휴식이다."

관조적 휴식은 일반적 의미의 휴식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어떻게 "관조적"으로 쉴 수 있을까요?​


[3] 각자가 생각하는 '강한 놀이'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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